본문 바로가기

삼성반도체이야기는 더 이상 Internet Explorer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최적의 환경을 위해 다른 웹브라우저 사용을 권장합니다.

[Behind the CHIP] 소, 돼지, 췌장, 그리고 반도체: AI와 생명공학이 만든 의료 혁신

우리는 과연 소나 돼지의 췌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독특한 요리 재료로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약 100년 전만 해도 이 장기들은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을 얻는 유일한 방도였다.

인체에 인슐린을 투입하면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수십 년 동안 인슐린의 상업적 생산은 주로 소와 돼지의 췌장을 이용해 진행되었다. 인슐린의 대량 생산에는 가축의 사용과 높은 생산 비용이라는 대가가 수반됐다. 일부 학자들은 인슐린 생산 관련 특허료를 단돈 1달러에 넘기며 당뇨병 환자들의 생명과도 같은 인슐린에 대한 과도한 상업화를 막고자 했지만, 당뇨병에 걸린 인간의 목숨이 여전히 소와 돼지의 췌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대에 상황이 크게 변화했다. 1978년 제넨테크(Genentech)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활용해 인간 인슐린을 최초로 생산했고, 1982년에는 일라이 릴리(Eli Lilly)가 ‘휴물린(Humulin)’이라는 제품명으로 상업화된 인간 인슐린을 출시했다. 학자들은 대장균에 인슐린 유전자를 삽입해 인슐린 단백질을 공장처럼 생산했다. 그 결과 인슐린 생산 비용은 급락하기 시작했고, 동물성 인슐린보다 대체로 부작용이 적어 환자들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 인슐린을 생산하기 위해 다른 포유류의 목숨을 담보로 잡을 필요가 없게 됐다. 아마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인슐린의 생산 가격은 향후 추가로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 이 질문의 핵심 열쇠는 바로 ‘합성 생물학(Synthetic Biology)’에서 찾을 수 있다. 합성 생물학은 세포나 유전체 등을 원하는 대로 재설계하여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고, 단백질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이 유전자 조각을 A에 붙이고, 다른 대사 경로를 제거하면 단백질 생성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고, 이를 실험실에서 검증하며 개선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시나리오 가짓수가 너무나 많고, 실험만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예컨대 인슐린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사람의 인슐린 유전자를 미생물에 삽입했을 때, 어떤 아미노산 변형이 대장균 생장에 부담을 덜 주면서도 인슐린 생산량을 높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선 유전자 시퀀싱 데이터부터 단백질 구조 예측 데이터, 미생물 대사 경로 데이터까지 모두 통합해야 하는데, 그 데이터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딥러닝’과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예시로 돌아가 보자. 인슐린 생산량을 높이는 최적해를 찾는 과정에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수백만, 수천만 개의 가능성을 초고속으로 시뮬레이션하여 가장 유망한 몇 가지 조합을 연구자에게 제시한다.

이후 연구자는 이를 받아들여 최종 실험 단계를 수행한다. 이때는 이미 성공 확률이 높은 시나리오들만 선택해 실행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과거에는 1년이 걸리던 연구가 몇 달, 심하면 몇 주 안에 가능해진다. 이처럼 현대 합성 생물학 연구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방대한 데이터 분석 및 시뮬레이션 실행은 연구자가 반드시 익혀야 할 필수 과정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디지털 트윈(Digital Twin)’과 유사하다. 디지털 트윈은 복잡한 실험을 실제로 진행하기 전에 가상의 모델을 무수히 돌려보고 최적의 경로를 찾기 위해 실제 환경과 아주 흡사하게 모사된 디지털 복제 환경을 의미한다. 주로 자율주행처럼 실제 환경에서 테스트하기 어렵거나 시행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분야에서 활용되는 기술인데, 합성 생물학 연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다만 이런 연구는 기술의 발전에 매우 민감하다. 시뮬레이션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분초 단위로 쏟아지는 유전자 정보와 단백질 구조 데이터를 누락 없이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이 제공하는 ‘AI 반도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합성 생물학 연구소에서는 대규모 유전자 분석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생성하는데, 이를 고성능, 고용량 메모리 기술로 단숨에 처리할 수 있다면, 연구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합성 생물학의 무수한 시뮬레이션이 가속화된다면, 특정 질환을 타깃으로 한 유전자 재설계, 신약 후보 물질 발굴, 미생물 대사 경로 최적화 등에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모더나와 화이자-바이오엔테크가 mRNA 백신을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개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오랜 연구 기반 위에 AI를 활용해 바이러스 유전자와 스파이크 단백질을 분석하고, 그 정보를 합성 생물학으로 빠르게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AI 알고리즘은 사스(SARS)나 메르스(MERS) 등 코로나 계열 바이러스 연구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 구조를 빠르게 해석했다. 그 후, 가장 유망한 후보 서열만을 추려내면, 연구자들은 그 소수 후보에 집중해 실험실 검증과 전임상 단계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수백, 수천 개 후보를 하나씩 검증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겠지만, AI와 합성 생물학의 접목으로 시행착오를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원리가 인슐린 생산뿐만 아니라 암 면역치료, 유전 질환에 대한 CRISPR 유전자 치료, 알츠하이머·파킨슨·당뇨병 같은 대사 질환 연구 전반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품질과 효율을 가진 의료 기술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 10년 후에는 “인슐린이 환자별 맞춤형으로 생산되어, 의료진이 개인별 유전자 특성에 꼭 맞는 약제를 손쉽게 처방한다”라는 뉴스를 들어도 우리는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가축의 췌장에 의존했던 인슐린 생산이 대장균이나 효모를 활용한 생합성 기술로 발전한 데 이어, 이제는 CRISPR/Cas9 같은 유전자 편집 기법과 합성 생물학이 결합해 환자 맞춤형 인슐린 변형체(Variant)까지 만드는 시대를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당뇨병 환자나 그 가족, 그리고 의료계를 포함해 인류 전반에 걸친 혜택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한때 없어서 못 구하던 인슐린이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생명줄이 되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기술 혁신으로 얼마나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 할 만하다.

목록